[AU/짐본즈] final frontier 2
2016.10.10 포스타입 업로드
* 벤술루벤도 나옵니다. 여전히 아무말 대잔치에 주의하세요
제 몸에는 조금 큰 얇은 니트를 입고, 졸린 눈을 하며 히카루는 미적미적 걸어와 식탁 앞에 앉았다. 어린아이 용 보조의자에 앉은 데모라가 “대디 늦잠 잤대요.” 라고 말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잠이 덜 깼음에도 딸아이의 웃음소리에 히카루도 덩달아 따라 웃었고, 곧 그의 눈앞으로 신선한 채소가 듬뿍 담겨 있는 샐러드 볼과 팬케이크 접시가 놓여졌다.
“히카루, 커피 마실래? 아니면 우유?”
“……으음. 커피, 달게 해줄래?”
“알았어.”
여전히 식탁에 반쯤은 엎어진 채로, 히카루는 커피를 내리고 있는 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데모라의 앞에는 투명한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고, 자신의 몫과 히카루 몫의 커피를 두 잔 가져와서는 테이블에 내려놓고 앉는다. “히카루, 엎어져 있지 말고.” 벤이 슬쩍 웃으면서 히카루의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히카루는 엎어져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켜서는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잠시 벤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까, 벤. 전에 ‘레너드 맥코이’ 박사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 있었지?”
“응? 아. 연애시절 때 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해? 응. 그랬지. 그 사람 논문을 봤었던 때에 이야기 했었던 거 같은데, 그건 왜?”
“난 당신에 대해서라면 뭐든 기억하거든.”
히카루가 슬쩍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팬케이크를 적당히 잘라 크림을 잔뜩 묻혀 입안에 넣기 직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지금 여기 와 있어.”
바로 팬케이크를 입에 넣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참을 우물거렸다. 이제 벤의 반응을 구경해볼까. 멍한 표정을 한 채로 샐러드 볼에 있는 토마토를 집는다. 토마토는 벤의 입에 들어가도 전에 미끄러져 접시에 떨어졌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히카루를 바라보는 벤은 표정만으로 진짜? 정말?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히카루는 벤의 이런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물론 본인에게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지금 대장님 댁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어.”
“진짜 온 거야? 어떻게?”
“지구에서 탈출 시켰대. 여기 정착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정착하지 않을까?”
히카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팬케이크를 먹으면서 그는 슬쩍 웃더니 “정착 한다고 하면 집에 초대할까? 다른 사람들도 부르고.” 히카루의 말에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신이 난 모양새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뭐, 저런 면도 사랑스럽지만.
히카루와 벤은 집이 가까워 매일을 같이 놀았다. 그러고 보니 사귀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히카루가 스타플릿에 지원했을 때, 벤 또한 스타플릿에 지원했다. 아카데미 학과는 달랐지만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데이트를 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벤은 한 박사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온갖 전문용어로 가득 찬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거의 못 알아들었다. 다만 벤이 잔뜩 신이 나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에게 그 박사는 아마 동경의 대상이었겠지. 데모라에게 팬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주는 벤을 보며 히카루는 커피를 홀짝였다. 자신에게 조지 커크가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히카루, 오늘은 쉰다고 했던가? 그럼 데모라 배웅 하고 쇼핑센터 갈래?”
“응. 좋지. 뭐 살 거 있어?”
“저번에 히카루가 부탁했었던 모종도 들어왔다고 하고, 비료도 사야하고. 가면 뭐가 더 있지 않을까.”
벤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듣고 있던 데모라는 “대디랑 파파 데이트 한다!” 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휴가는 좀 기니까 저번에 못 갔던 곳도 놀러가자.” 라고 말하면서 히카루는 데모라의 머리를 쓰다듬다 그 이마에 살짝 입 맞췄다.
제임스는 레너드와 조안나가 정착하는데 필요한 수속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레너드는 몇 번이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패드에 서류를 작성하면서 레너드는 조안나의 이름을 쓸 때 고민했다. 한참이나 손이 움직이지 못하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마냥 그는 멍하니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마냥. 한참이나 아무 변화가 없는 레너드의 모습에 제임스는 옆으로 와서 앉아서는 “……닥터 맥코이?” 하고 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레너드의 시선이 제임스를 향했다. 제임스는 잠시 레너드를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패드에 시선을 놓고는 그가 망설인 부분을 알아차렸는지 그저 말없이 다시 그를 바라보다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제임스가 입을 연 것과 동시에 레너드도 입을 열었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이 입을 다물었다. 레너드의 눈이 어쩔 줄 몰라 이리 저리 흔들렸다. 제임스가 “먼저 말씀하세요.” 라고 말하며 슬쩍 웃음을 터트리자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조안나의 성을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뭐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하고 나니까 괜히 고민한 거 같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레너드는 조안나 앤더슨이라고 이름을 기입했다. 앤더슨. 파멜라의 성. 파멜라 앤더슨과 브래들리 앤더슨의 외동 딸. 레너드는 빠짐없이 기록 해나가기 시작했고 제임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음. 미들네임으로 넣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조안나 맥코이 앤더슨.”
그 목소리에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조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임스를 바라봤다. 자신을 쳐다보는 조안나를 향해 제임스는 웃어주더니 다시 레너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닥터 말대로 굳이 바꾸거나 넣을 이유도 없죠. 성이 다르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그건, 그래요.”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며 겨우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웃었다. 모든 사항을 기입한 패드를 제임스에게 내밀자 그는 서류의 내용을 살피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꽉 채워져 있었지만, 레너드 맥코이의 이력 사항이 텅 비어있었다. 제임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방 표정을 풀었다.
“……텅 비었네요.”
“……네?”
어느 새 제 앞으로 온 조안나의 손을 잡고 놀아주는 데 전념하고 있던 레너드는 제임스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는 반문했다. 그의 행동에 제임스는 패드의 빈 이력사항을 보여주었고, 레너드의 표정이 잠시 찡그러졌다 펴졌다.
“……어차피 연합 이력이라, 별 소용없을 것 같아서요.”
“소용이 없기는요. 훌륭한 이력이잖아요?”
제임스는 레너드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파란 눈으로. 레너드는 입을 벌렸다가 금방 다물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딱히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음.” 레너드가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조안나가 레너드의 손을 한 참이나 조물 거렸다.
“당신은 훌륭한 의사잖아요.”
제임스의 말에 레너드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한 참이나 레너드의 손을 조물 거리던 조안나가 “맞아, 선생님은 대단해요.”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 레너드는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우물쭈물 거렸다. 그는 결국 길게 숨을 내뱉고는 제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임스와 조안나가 눈을 마주치더니 웃더니, 레너드의 손에 패드를 건넸다.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죽이 잘 맞았어? 응?”
자신의 앞에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는 조안나를 향해 묻자, 조안나는 “미스터 커크랑 친구하기로 했거든요.” 라고 대답했다. 패드를 조작하던 레너드의 고개가 제임스를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제임스는 그저 웃었다.
“……새 집을 구할 수 있다면, 나갈게요. 우선 일자리부터 구해야겠지만.”
“일 자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가 추천서를 써드릴게요.”“커크, 나한테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사실 혼자 살면서 좀 적적했거든요. 근데 요 며칠은 재밌었어요. 그리고……닥터랑 조안나만 괜찮다면 계속 이대로 지내도 좋아요.”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만큼만 도와주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또 다시 파란 눈이 레너드를 빤히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레너드는 잠시 생각했고, 고민했다. 연합에서, 지구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바라지도 않고 단순한 호의만을 가지고 대해준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했다. 몇이나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연합 초기에는 괜찮았었는데, 언젠가 부터는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다. 그 뒤에는 제 주변의 사람들 말고는 없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던 사람이 이렇게 단순히 호의만 가지고 대해준 적은 있었던가. 아마 없었지. 레너드가 숨을 내뱉었다. 부담이라기보다는 그래, 이건 미안함에 가까웠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받고 만은 못 사는 성격이에요, 커크. 당신은 날 많이 도와주고 있으니까……만약 당신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도 도울게요. 당신 말대로 돕고 사는 거니까.”
그 말에 그저 제임스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수속이 끝났다는 말을 들은 후에, 세 사람은 쇼핑센터로 향했다. 레너드와 데모라는 정말 맨 몸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동안 데모라는 제임스가 어릴 적에 입었던 옷들을 찾아내서 빌려 입었고, 레너드는 그의 옷을 빌려 입었다. 제임스의 체격이 레너드 보다 큰 편이었기 때문에 다소 헐렁했지만, 입고 움직이는데 큰 불편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쇼핑센터에 오는 것 또한 레너드는 거절하고 싶었다. 그들은 돈 또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가 확실해진 후에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또 제임스의 옷을 그 때까지 마냥 빌려 입을 수는 없었다. 제임스는 그것을 꼬집어 주며 그냥 이 참에 확 빌리고 나중에 갚으면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국 레너드는 제임스의 말에 졌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히 그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정도로만, 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어느 새 봉투가 한가득 이었다. 레너드는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봉투를 바라봤다가 제임스를 바라봤다.
“……난 분명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로만……이라고 말했어요, 커크.”
“전혀 부담 안 되는데요?”
그 말에는 어떠한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대체 얼마를 받고 사는 거야? 레너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레너드는 그에게 얼마나 갚아야 하는지 돈을 계산하다 결국 포기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거든요?” 다소 불만스런 목소리로 그에게 항의를 표하자 그는 그저 모르는 척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안나가 내민 캔을 따주면서 언제 챙겼는지 모를 빨대까지 꽂아 건네줬다. 자동차에 기대서 음료를 마시는 조안나를 바라보던 레너드는 조안나의 시선이 하늘에 꽂혀 있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높은 하늘에 마치 오로라 같은 것들이 무지개마냥 호선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저런 거 처음 봐요.”
조안나가 고개를 높이 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레너드도 처음 보는 광경에 “……선생님도 처음 본다.” 라는 말 뿐이 할 수 없었다. 커크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다가 금방 고개를 내리고 입을 열었다.
“‘넥타’들의 집단 비행이라는 거예요. 몸 자체에서 오로라 같은 빛을 뿜어내는데다 날개마저 투명하니 단체로 날아다니면 진짜 아름답죠. 전에 우연히 한 번 같이 날아본 적이 있는데………”
제임스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가 곧 실실 웃음을 흘렸다. 표정에서부터 엄청났다라고 말해오고 있어서, 레너드는 그가 그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단숨에 알았다.
“진짜 최고였어요.”
“……그러고 보니 캘빈에는 ‘넥타’의 서식지가 있다는 걸 봤네요. 지구에는 없었는지라.”
“‘넥타’가 좋아하는 자연식물이 이 행성에 많다고 하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어쩌면 넥타가 이 행성의 토착생명체 일지도 모른다고 했었어요.”
“그 내용, 전에 무슨 논문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뭐였더라. ‘넥타의 기원’ 에 대한 논문이었던가. 흥미롭고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
레너드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렇게 이야기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조안나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넥타들의 무리 비행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고, 조안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그 광경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그 논문 쓴 사람. 나 알아요. 아까 말했던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 말에 레너드가 한 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제임스를 바라봤다. “스타플릿에서, 아니 캘빈에서 넥타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걸요.”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임스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울리는 핸드폰을 잡고 뜬 이름에 “때 마침 또 연락이 오네요.” 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임스의 집은 혼자 사는 사람의 집 치고는 매우 넓은 편이었고, 그 만큼 빈 방이 몇 개 있었다. 조안나는 작은 방을 썼고, 레너드는 조안나의 옆방을 썼다. 레너드는 매일 밤 조안나를 재워주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는데, 오늘 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잔뜩 돌아다녀서 힘이 들 법도 한데, 조안나는 지치지도 않는지 눈이 제법 말똥말똥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조안나를 보며 레너드는 침대에 조금 걸터앉았다.
“잘 시간, 한 참 지났어.”
“그렇지만 잠이 안와요.”
“저런. 어떻게 해야 네 잠이 다시 돌아올까 모르겠네.”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조안나가 조금 몸을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누워 레너드를 바라봤다. 파란 눈에 등불이 비쳤다.
“……우리 그럼 앞으로 여기서 살아요?”
“응. 아마도.”
“다시는 안 돌아가요?”
“응. 그럴 거야.”
“나 엄마가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이제 영영 못 보는 거죠?”
레너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조안나의 시선을 피했다가 고개를 숙이기를 반복했다. “…………그래.” 겨우 그렇게 대답하며 그는 길게 숨을 뱉었다. 입안이 온통 쓴 맛이 도는 것만 같았다.
“그럼, 있잖아요. 미스터 커크한테 허락을 받아서 하우스에 꽃밭을 만들어요. 거기에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가득 심고, 엄마 이름을 짓는 거예요. 그럼 엄마가 옆에 있는 것 같을 것 같아요.”
조안나의 말에 레너드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을까. 처음 차를 타고 이 집으로 오는 동안? 아니면 함선의 안에서 깨어 있었을 동안? 레너드는 조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물어보자. 그렇게 하자.” 겨우 대답했다. 목소리가 겨우, 겨우 쥐어짜야 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진짜 자야지. 너무 늦게 자면 안 돼.”
“네. 잘 자요, 선생님.”
“그래, 너도 잘 자.”
레너드는 조안나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겨주고는 등을 끄며 일어났다. 분명 오전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된다고 했으면서 뭔가를 부탁하려고 하다니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금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멍하니 조안나의 방문 앞에 서 있으니 차가운 병의 감촉이 볼에 느껴졌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어느 새 다가온 제임스가 차가운 맥주병을 제 볼에 대고 있었다.
“술 마시죠? 가볍게 한 병씩 할래요?”
제임스가 웃었다. 레너드는 문득 생각했다. 이 남자는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지. 레너드가 맥주병을 잡자, 제임스가 손을 놨다. 이미 뚜껑까지 따져있는 병을 보며 레너드는 “내가 술 못 마신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라고 묻자 제임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 내가 2병 마시는 거죠.” 라고 대답하며 또 다시 웃었다.
“……조금 술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제가 좀 타이밍을 잘 맞추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의 카우치소파에 앉았다. 레너드도 옆 공간에 앉으며 맥주를 한 모금 먹고는 잠시 침묵 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사람이 그렇게 잘 웃어요?”
“음. 이런 말 하면 좀 안 믿겠지만 예전에 웃기는커녕 그냥 문제아였어요. 사람도 안 믿고, 불만도 많고. 한 번 죽을 뻔도 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큰일이 날 뻔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겪다보니 그 때야 알았어요.”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맥주를 물을 마시는 것 마냥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그 이후 항상 제가 새기고 다니는 말이 있어요. 길을 잃을 때도 있는 법이지. 같은 말이요.”
그 말에 레너드는 가만히 제임스를 바라봤다. 그는 먹다 남은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소파에 그대로 몸을 뉘였다. 가만히 천장만을 바라보던 제임스가 고개만 살짝 돌려 레너드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닥터는요. 닥터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게 없는 것 같아서.”
“……뭐. 별 거 없어요. 사실 난 처음부터 연합군에 들어 갈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냥 캘빈으로 오고 싶었는데. ………난 마커스 제독을 진짜 아버지처럼 따랐어요. 연합군도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는데, 언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이번에는 레너드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만약 마커스 제독의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지금 쯤 어땠을까. 파멜라는 살아있고, 조안나와 파멜라는 평범한 저녁식사를 하고 같이 잠이 들었겠지. 자신은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한 손으로는 맥주병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잡듯 붙잡았다.
“………나 때문이에요.”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제독의 제안을 거절해서, 파멜라가 그렇게 된 거에요.”
레너드의 말에 누워 있던 제임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레너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 머리를 여전히 쥐어 잡듯 붙잡고 있었다. 제임스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몇 번 두드렸다.
“헤이, 이봐요. 닥터.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죠.”
레너드가 숨을 길게 뱉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한숨이라고 제임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울지 않는다. 제임스는 잠시 말을 고민했고, 침묵을 지켰다.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다시 땅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맥코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누구의 탓도 아니고요.”
레너드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꽉 잡고 있는 손이 눈에 들어 올 정도로 떨렸다. 레너드 맥코이는 또 다시 생각했다. 자신이 프로젝트를,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파멜라는 살아있을 것이고 조안나는 자신의 엄마와 행복한 저녁식사를 하고 잠들었을 것이다. 자신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자신은 어땠을까. 아마 결국 버티지 못하고, 스콧처럼 탈출하려고 했을까? 아마. 아마도. 아마도 그랬겠지. 자신은 거의 벼랑 끝에 있었다. 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커크. 나는 훌륭한 의사가 아니에요.”
레너드는 제 얼굴을 감싸며 겨우 그렇게 말했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똑같았지만 제임스는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렸고, 레너드는 숨죽여 울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이대로 잠들면 아침에 눈이 퉁퉁 붓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레너드는 세수를 했다.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세면대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폐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계속 폐 끼치고 있네. 한숨을 내뱉고,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나가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리고 그가 욕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문 옆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제임스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좀 괜찮아요?”
“……그……예에. 미안합니다.”
“으흠. 음. 괜찮아요. 가끔 그렇게 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요. 속 안에 쌓아두는 것 보다는 훨씬 이요.”
“……저는 딱히,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요? 아닌데. 내가 보기에는.”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눈은 자신을 종종 꿰뚫어 본다. 아니, 종종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그런 느낌이 든다. 마치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멍하니 그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제임스가 고개를 가까이 하며 다가왔다. 레너드는 순간 숨을 멈췄고, 제임스는 곧 레너드의 어깨에 붙은 실 자락을 떼어내 보이며 웃었다.
“왜 그래요?”
“……아. 아뇨. 그냥 좀 놀라서요. ……커크. 조금 허락을 받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레너드의 말에 제임스는 한 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뭔데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표정을 바라보던 레너드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봤다가 시선을 피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하더니 느릿느릿 말했다.
“……조안나가 미스터 커크에게 허락을 받아서 하우스에 작은 꽃밭을 만드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파멜라가 좋아했던 것들 심고, 그 꽃밭 이름을 파멜라라고 짓자고…….”
레너드는 말끝을 흐리며 제임스를 바라봤다. 제임스의 표정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그가 곧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엄청 멋진 생각이에요.”
“언제부터 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제임스는 어딘가 들 떠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과 말에 레너드도 결국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손으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로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닥터 자주 좀 웃어요. 그 편이 훨씬 보기 좋아요.” 제임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또 다시 웃으며 레너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고, 레너드는 그 눈을 잠깐 바라봤다가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정말로.
“……커크, 진짜 저랑 조안나가 와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애초에 우리 셋을 다 초대한 거라니까요. 되게 사람 말 못 믿으시네.”
제임스는 웃으면서 한 집의 벨을 눌렀다. 그의 품에는 이제 막 갓 구워져 나온 따끈한 바게트가 들어 있는 빵 봉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커크의 함선에 타고 있는 ‘히카루 술루’ 라는 대원의 집에 초대 받았다. 그에게는 남편이 있고, 조안나와 비슷한 또래의 딸아이가 있다는 것 까지는 제임스에게 들었다. 조안나는 레너드의 손을 잡고 조금 상기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와있을 테니, 이 참에 소개 시켜줄게요.”
집 안에서 어린아이가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임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이건 틀림없이 데모라네.” 라고 말하며 웃었다. 곧 문이 열리고 한 참 아래에서 “어서 와요!” 라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뒤에는 히카루가 서 있었다. “데모라, 그렇게 뛰어다니면 넘어진다니까. 어서 오세요, 대장님. 그리고 닥터 맥코이. 제일 늦으셨어요, 대장님.” 히카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이며 살짝 웃었다.
“원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라잖아.”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레너드와 조안나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며 뒤 따라 들어갔다. 제임스는 히카루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해야하는지 한 참을 고민했고 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진짜 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레너드 맥코이입니다.”
“네. 알아요. 닥터. 벤이 자주 이야기 해줘서 닥터 이름은 익숙하거든요. 네가 조안나구나. 안녕.”
히카루는 레너드에게 말하고는 그대로 허리를 조금 숙여 조안나와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조안나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며 레너드의 뒤로 살짝 숨었다. 레너드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는 조안나. 하고 작게 이름을 불렀다.
“난 데모라!”
데모라가 한 팔을 높이 뻗어서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 소리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레너드의 뒤에 살짝 숨었던 조안나까지도. 데모가 먼저 성큼 조안나의 앞으로 다가섰다.
“같이 놀래?”
데모라의 말에 조안나는 잠시 레너드를 바라봤다. 레너드는 말없이 그저 조안나를 바라봤고, 곧 다시 데모라를 바라 본 조안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두 아이가 손을 잡고 뛰어갔다.
“아이들은 금방 친해지더라고요.”
히카루의 말에 레너드도 동의했다.
히카루를 따라 들어간 넓은 거실에는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한 잔 씩 하고 있었다. “늦었수다!” 스콧이 그렇게 외치면서 소파에서 일어나서 잔 두 개를 두 사람에게 줬다.
“내가 끝내주는 빵을 사왔는데?”
“스타플릿 근처 큰 사거리에 있는 빵집이요?”
“거기 빵이 좀 끝내주긴 하지.”
우후라의 말에 스콧이 받아치며 껄껄 거리며 웃었다. 제임스는 빵 봉투를 히카루에게 건넸다. “이걸로 안주 더 만들면 되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부엌에 찰싹 붙어 있는 벤에게로 다가갔다.
“벤. 맥코이 박사님한테 인사 안 해?”
벤은 샐러드 볼을 든 채로 레너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뭐 잘못 했나?” 레너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움찔거렸고, 그 광경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웃고 있던 제임스는 겨우 진정을 하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레너드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소개시켜줄게요. 이 쪽이 우리를 초대해준 히카루 술루와 벤 술루 부부. 참고로 히카루의 조종 실력은 정말 끝내줘요. 벤은 닥터가 봤다는 ‘넥타의 기원’에 관련 된 논문을 쓴 사람이고요. 넥타연구가 이면서 스타플릿 연구소에서 일하죠.”
“아. 당신 논문을 정말 흥미롭게 봤어요. 벤. 약 개발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죠. 새로운 것도 알고.”
“저야, 저야말로. 존경해요. 맥코이 박사님. 박사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나 혼자 해낸 게 아니에요.”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 말에 벤도 따라 웃더니 “사실 언제나 그렇죠. 혼자 해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이뤄내는 거죠.” 라고 말하며 가볍게 악수를 청했고, 레너드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말, 전에 내가 어디서 했던 말 같은데.” 그 말에 벤이 또 다시 웃더니 “동영상으로 봤어요.” 라고 대답했다. 제임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몽고메리 스콧. 어차피 두 사람은 연합 시절부터 아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맞죠? 그 옆 친구는 체콥. 나이는 어리지만 머리가 아주 똑똑해서, 의지가 되는 친구죠.”
체콥이라고 불린 청년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인사를 건네는 발음이 다소 어눌했지만, 듣기에 아예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그 모습에 레너드도 결국 따라 웃었다.
“그리고 이쪽은 우후라. 우리함선 제일가는 언어학자이자 뛰어난 파일럿이죠. 그리고 그 옆은 스팍. 사실 함선 최고 관리자는 나고, 함장 직도 내가 수행하는 것도 맞지만 난 그와 동시에 파일럿도 겸하고 있다 보니 실제적으로 함장 일은 스팍이 대리로 하는 경우가 제일 많죠.”
“스타플릿 내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함장님.”
“-스파악. 모두가 모여서 노는 자리에서는 그러지 말자 우리.”
제임스의 말에 우후라가 웃음을 터트리며 스팍의 팔을 살짝 쓰다듬듯 붙잡으며 “맞아요, 스팍. 그리고 암만 말해도 안 들을 사람이에요.” 라고 대꾸했다. 그 말에 제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내 욕한 것 같은데. 닥터, 내가 잘 못들은 게 아니죠?” 라고 레너드에게 묻는 제임스의 모습에 그는 그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랜만에 스콧과 긴 대화를 했다. 파멜라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지에 대해서. 스콧과의 대화가 정리 된 다음에는 벤 이었다. 벤과는 제법 긴 대화를 나눴는데 그 와의 대화 속에서 제한적으로 열람했던 논문과 달리 넥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캘빈과 넥타는 서로 공생하며,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 넥타들의 피는 위험하지만 그들의 타액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는 점 등에 대해서.
술로 목을 축이며 제임스는 창가에 서서 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레너드를 바라봤다. “함장님.” 어느 새 곁으로 다가온 우후라가 제임스의 옆에 섰다. 그는 대답 대신 그저 다시 술을 마시며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잠시 제임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조용하게 말문을 열었다.
“방금 조금 사랑에 빠진 눈 같았어요.”
“술에 취한 눈이 아니라?”
“그 정도로 안 취하잖아요.”
“아. 그냥 좀 넘어가주지. 안 넘어가주네.”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는 빈 잔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냥 계속 눈이 가더라고.” 제임스는 그렇게 툭 말을 내뱉었다. 그가 팔짱을 끼면서 길게 한 숨을 내뱉었다. 우후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제임스를 바라봤다.
“맞아. 부정 안할게. 나 약간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그 말에 우후라가 살짝 웃었다. 어느 새 벤과 레너드의 대화에는 스팍까지 껴서 마치 학회장의 토론 같은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언제가 아니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빠져버린 거겠죠.”
우후라의 말에 제임스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녀는 제임스의 눈을 보고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웃었다. 여전히 세 사람의 토론회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아마 이주일 정도가 지났던 것 같다. 제임스의 추천도 추천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그동안의 이력도 한몫을 한 모양이었던지 스타플릿 직속의 메디컬 센터 근무가 확정 되어서 그는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남들보다 이른 출근을 하고, 조금 늦은 퇴근을 했다. 제임스는 스타플릿에 정시 출근을 하고 정시 퇴근을 했으니 레너드가 퇴근을 하고 오면 매번 그가 자신을 반겨줬다. 그러면 셋이서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레너드는 조안나를 재웠다. 조안나에게 파멜라가 비행을 하면서 겪었던 일이나 어릴 적 일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어쩌다 레너드가 늦는 날은 조안나를 재우는 것은 제임스의 몫이었다. 저녁 시간에 맞춰서 퇴근하지 못하면 두 사람은 먼저 저녁을 먹고, 조금 시간을 때운 뒤 조안나를 재울 준비를 했다.
레너드의 일자리가 정해진 것처럼 조안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히카루와 벤 덕분에 데모라가 다니는 스쿨에 들어갈 수 있었고, 종종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로 데모라와 뭘 하고 놀았고, 무슨 일이 있었고 같은 그런 이야기였지만 레너드도, 제임스도 조안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대꾸했다. 그리고 그 날도 레너드는 저녁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늦는다는 연락을 받고 두 사람은 먼저 저녁을 먹었다. 스튜를 먹으며 조안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천천히 늘어놨다. 제임스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반응했다.
조안나가 침대에 눕고, 제임스가 그 침대에 걸터앉으며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라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조안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임스를 바라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작은 입을 한 참이나 오물거렸다.
“왜?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
“음. 미스터 커크는 선생님을 좋아해요?”
“그럼. 좋아하지. 엄청. 조안나도 좋아하잖아.”
“응. 나도 미스터 커크랑 선생님이랑 다 좋아요.”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웃었다. 조안나의 눈이 제임스를 따라왔다.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라고 제임스가 또 다시 묻자 조안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미스터 커크는 선생님을 좋아하잖아요, 아주 많이.”
제임스는 그 말에 잠시 말없이 조안나를 바라보다가 아주 활짝 웃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그 말에 조안나는 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표정을 살짝 찌푸린 조안나가 “왜요?” 라고 물었고, 제임스는 그런 조안나의 찌푸려진 이맛살을 손으로 살짝 문질러주며 대답했다.
“내가 수줍음이 많아.”
“미스터 커크가?”
“의외지? 근데 어떻게 알았어?”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걸.”
그런 대답에 제임스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잘 자, 조안나.” 라고 말하며 등을 껐다. “잘 자요, 미스터 커크.” 조안나의 인사와 함께 제임스는 방을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던 주말은 하늘이 맑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 어디라도 놀러가야 할 것만 같았지만 세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그 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놓은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바로 작은 화원을 만드는 일. 제임스의 집에는 작은 유리 하우스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제임스의 어머니의 취미 거리가 원예라고 했었다. 그녀의 취미를 뒤 이어 제임스가 종종 관리를 하긴 했지만 그는 땅 보다는 하늘에 있는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관리를 한다고는 해도 집을 자주 비우고, 땅을 자주 밟지 않으니 하우스는 거의 정글 이었다. 기본적인 도구는 있었고, 아직 심을 수 있는 모종이나 씨앗도 남아 있는데다 새로 사 온 모종들과 씨앗들도 있으니 세 사람은 각자 도구를 잡고는 하우스를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반나절 동안 꼬박 하우스를 정리하는 일에만 매진했다. 부지런하게 움직인 덕분인지 하우스는 어느 정도 정리 됐고, 세 사람은 온통 땀과 흙과 풀이 묻어 마치 재투성이 같았다. 양 볼에 흙이 묻은 조안나가 흙이 묻은 제임스의 얼굴을 보더니 곧 어린아이 용 물뿌리개를 가지고 그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흙탕물이 그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고, 제임스는 곧 푸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는 조안나의 뒤를 쫓았다.
“내가 바로 흙탕물 괴물이다!” 그렇게 외치는 제임스와 기분 좋은 소리를 내지르며 달리는 조안나. 조안나는 꺄르륵 소리를 지르며 뛰다 제임스에게 붙잡혔다. 조안나를 붙잡아 높이 안아 올리자 하우스에는 두 사람이 웃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런 두 사람을 레너드는 앉은 채 구경했다. 유리 천장을 톡톡, 두드리며 비가 내렸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소나기인가. 레너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비 온다!” 라고 외치며 조안나가 하우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말릴 틈도 없었다. 헉. 하고 레너드가 크게 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안나의 뒤로 제임스가 따라 나갔고, 두 사람은 레너드가 걱정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빗속을 신나게 뛰었다.
두 사람을 이제라도 불러서 멈추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레너드는 결국 마음을 접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 사이로 서서 여전히 뛰어노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기분 좋게 비가 내렸다. 흙냄새가 진해지고, 풀 냄새도 진해졌다. 레너드의 눈이 조안나를 쫓고, 제임스를 쫓았다. 그러다 문득 제임스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비가 그쳤다. 조안나는 물웅덩이를 쫓아 점프했고, 제임스는 그런 조안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또 다시 레너드와 제임스의 눈이 마주쳤다. 꽤 오랜 시간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조안나가 다른 물웅덩이에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가 고개를 돌렸다. 레너드의 시선은 여전히 제임스를 향해 있었다.
아.
그리고 순간, 레너드 맥코이는 생각하고,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자신은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그리고 또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뭘 쓰고있는거람 .. 마지막은 이번주 안으로... 들고오겠습니다 출근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