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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제이] 메리 크리스마스

[[]] 2014. 12. 25. 21:06






남자에게 있어서 그녀는 영원한 소녀이고, 여자아이였다. 남자는 그 어린 소녀를 보면서,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 남자는 아이를 볼 때마다 밀려오는 후회와 죄책감을 남자는 다시금 상기했다. 남자는 자신의 친구를 대신하여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고, 때로는 아이에게 죽은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더랬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되고 아이의 분노와 증오가 자신을 향하는 것 또한 남자는 생각했다. 죄책감, 그리고 후회. 그렇게 뒤늦게 밀려오는 감정과 함께 모든 것을 다시 떠올려도, 되돌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이미 시간은 지나가버렸고, 돌리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매해 성탄절이 돌아올 때면 그 날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위해 모든 일을 밀어두었다. 그 날만큼은 아이를 찾아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데 힘썼다. 죽은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아이에게는 그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주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온 정성을 다하는 남자를 따랐고, 언젠가 그의 옆에 서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남자는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하는 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거나 설명해준 일은 없었지만, 종종 남자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남자를 부를 때 ‘장군’이라고 불렀었다. 아이가 만지기를 좋아했던 남자의 손은 오래 된 상처들로 가득한 투박한 손이었고, 남자는 제 손을 만지는 아이를 보면서 ‘이 손의 상처만큼 남들을 상처 입혔다.’ 라는 식으로 종종 이야기 하고는 했었다.

아이는 그렇게 더욱 컸고, 남자가 매해 성탄절에 주는 선물도 아이의 나이에 따라 조금씩 종류가 달라졌다. 그래도 아이는 남자에게 있어서 여전히 어린 소녀였다. 점점 키가 커지고,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제 둔을 똑똑히 담아내며 남자는 아이를 가리켰다. 남자는 아이에게 아버지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남자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금 떠올렸다. 과거에 어린 소녀를 보았을 때 했던 생각을. 이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되어, 그 분노를 자신을 목표로 삼았을 때를.


거칠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은 제법 찼지만, 제이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제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몇 개비가 남았는지 생각했다. 진실을 알게 된 날, 끌려 나가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그리고 남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각자 위치가 있다고. 그리고 얼마나 절규했던가. 그는 왜 자신을 거둬들이고, 자신을 가르쳤을까. 회장은 어쩔 수 없는 섭리였다며, 장군은 당연한 선택을 한 것뿐이라며 덤덤하게 대답했을 뿐 이었다. 하지만 그도 왜 장군이 제이를 거뒀는지는 대답해주지 못했다.

제이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왜 그가 자신을 거둬들이고, 이렇게 가르쳤을까.

들려오는 발소리는 제법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제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에 벽에서 등을 뗐다. 누가 올지는 알고 있었다. 제이는 피우던 담배를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직 남은 불씨를 구둣발로 밟고, 그녀는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나타난 남자는 오래전부터 이미 익숙해져 있는 남자였다. 짙은 감색 군용 코트를 입고 등장한 그는 천천히 제이를 훑어보는가 싶더니 제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제이를 향해 제법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같구나.”
“별로 댁이랑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

이렇게 마주보며 인사를 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남자에게 제이는 아직도 그저 소녀였다. 어리고 어리던 그 소녀.

“크리스마스잖나. 항상 이때는 너랑 보냈었는데 말이지.”
“이봐, 장군.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난 지금 댁이랑 이런 수다나 떨려고 나온 거 아냐. 내가 지금 당장 여기서 댁을 쏴버릴 수도 있어.”

“잘 알잖아?” 라고 덧붙이면서 제이는 그제야 똑바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아니 웨슬리 슬로언은 그런 그녀를 마주 응시하다 제 턱을 손으로 살짝 쓸었다. 제이의 시선은 여전히 웨슬리를 향해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럼 쏘게.”
“지금이 기회야.” 제이는 웨슬리의 말에 자세를 고쳐 똑바로 자리에 섰다. 웨슬리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떤 말도 나누지 않고, 침묵만이 오고갔다. 제법 긴 시간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웨슬리는 곧 군용 코트에 손을 넣었다. 제이는 그 순간 잠깐이지만 긴장했다.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이었다. 제이의 시선은 여전히 웨슬리를 향해 있었고,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남자의 손이 나오고, 그 손에 들린 의외의 물건에 제이는 “허.” 하고 혀를 차버렸다. 제이를 향해 내밀어진 것은 잘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
“받아. 자네 거야.”
“……댁 노망이라도 들었어?”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야. 라고 말하려던 제이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웨슬리는 그런 제이를 보고는 한 발자국 다가섰다. 곧 별 고민 없이 팔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고 그 손에 상자를 쥐어줬다.

“……왜 그랬어?”

웨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는 그런 그를 보면서 몇 번이고 떠올렸던 생각을 되새겼다. 이것이 그가 자신에게 준 기회인가. 새로운 기회. 웨슬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모든 걸 내주었다. 아마도. 모든 것을. 손에 들린 잘 포장된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제이는 손에 들린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너는 강해.”

그리고 그런 제이를 향해 웨슬리가 뱉은 말에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호기롭게 빛나는 눈이었다. 뜻이 넘쳐나고 강한. 웨슬리는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뻗은 팔이, 손이 그녀의 머리를 향했다.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으며 쓰다듬어 주면서 남자는 말했다.

“……나만큼……아니, 나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녀의 총구가 완전히 자신을 향하게 될 때, 그리고 비로소 그녀가 자신을 죽이는 데 성공할 때 자신은 분명 기쁠 것 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웨슬리는 바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그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작은 상자에 껴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하고는 쪽지를 확인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으마. 메리 크리스마스.’

그녀의 목표는 그 누구보다도 확고했고, 그 의지또한 확실했다. 앞으로 그녀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