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종종 꿈을 꾼다. 그건 에고가 꾸게 하는 꿈도 아닌 자신 스스로가 꾸는 꿈. 선택의 길에 놓여서, 상대를 쏠 것인가 말 것인가. 종종, 아주 종종 찾아오는 꿈 이었다. 남자의 꿈은 남자에게 선택을 하길 강요했다. 왜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고, 선택하라고 누군가 종용한다. 그 상대는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 이었고, 아주 가끔 아는 사람의 얼굴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꿈속에서 나온 상대방의 얼굴은……….
레너드는 그렇게 꿈에서 깼고,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꿈속에서 총구를 들이댔던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도 이 이마에는 총구가 대어져 있고, 자신은 그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만 같았다. 꿈은 꿈일 뿐이고, 남자는 그 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꿈만큼은. 그 충격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선택을 강요하는 꿈. 어째서인지 종종 반복되는 악몽. 레너드는 그저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꿈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도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오래간만 이었다. 아니 꿈보다도, 꿈에 나온 상대방 때문이겠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힐 요원.’늙은 상점의 주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뇌가 멈출 수도 있었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책상위에 놓여 있는 단말을 급하게 집었다. 음성 메시지를 녹음하기 위해서.
하지만 바로 무언가를 말하지는 못했다. 긴 침묵이었다. 아주 긴 침묵. 온갖 대화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 그리고 그 모습들. 모든 것들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최초의 순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처음 마음을 토로했었을 때와 그 뒤의 모든 것들. ……소년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레너드는 확신하지 못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소년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어떤 말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래, 표현하자면 겁쟁이인가.
이대로 지내고 싶다고 하면 이기적인 걸까요. 소년은 그렇게 이야기 했었고, 자신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이기적인 것은 소년이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레너드 힐은, 이기적이었다. 그래. 이기적인 남자였다. 관계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고, 소년이 밀어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는 항상 물어봤다. 불편하시면 이야기 해주십시오. 라고.
긴 침묵이었다. 레너드는 긴 침묵을 깨야만 했다. 음성 메시지 녹음은 벌써 2분이 지나가 있었다.
“……이건……이 음성 메시지는…….”
레너드는 드디어 입을 열었지만 좀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레너드는 한 번 더 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이건, 만약 제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기거나 혹은 제가 죽거나……아니면 제 단말이 망가지거나 할 때 자동으로 전송되는 음성메시지입니다. 마지막은 조금 황당하겠지만. 가끔은……. 이런 황당한 경우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레너드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잠시 제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곧 제 이마를 눌렀다. 맞은편의 에고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꿈은 여전히 생생했고, 이마에 대고 있던 총구의 느낌도 생생했다.
“……꿈을 꿨습니다. 악몽을요. ……이 꿈에서 상대방은 항상 잘 모르는 사람이 나오거나, 아니면 가족이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는데……이번에는, 당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선택하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 손에는 총이 들려 있고…….”
레너드는 다시 또 침묵했다.
“……저는 당신을 쏘지 못합니다.”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긴 침묵이었다. 레너드는 잠시 말없이 제 입 주변을 쓸어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선택. 눈앞의 사람을 쏘던가. 등 뒤의 사람을 쏘던가. 아니면……저 스스로를 쏘던가. 저는, 절대로 당신을 쏠 수 없습니다. 쏘지 못합니다.”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냥, 그저. 방금 그 꿈을 꿔서요. 그리고 꿈에 당신이 나와서요.”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곧 제 이마를 문질렀다. 다시 또 침묵.
레너드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마치 눈앞에 누가 있기라도 한 마냥. 아무것도 없는 공허를 응시한 채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레너드는 아주 잠깐 침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많이 좋아합니다. 계속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허락만 해준다면 말입니다. 요즘 계속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또 ……기대를 품었습니다.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또 침묵을 했다.
“……사실은 제가 이기적인 겁니다. 얼마든지 제 선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충분히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가급적이면 더 오래, 있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처럼 좋은 사람이 아닐 겁니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제 왼쪽 눈을 손으로 살짝 누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건, 원래 직접 보면서 말을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만……아무래도, 그 이후부터는 모든 용기와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살면서도……또 다시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게 무섭거든요.”
레너드는 잠시 단말을 앞에 있는 작은 협탁 위에 올렸다. 곧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채로 또 다시 한 참을 침묵했다. 한 참 긴 침묵이 이어졌다. 처음의 침묵처럼. ‘……그럼, 그럼 옆에 있어주세요. 나쁜 꿈꾸지 않게요.’소년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문득. 그때의 말이. 결국 자신은 소년에게 모든 것을 내줄 것이었다. 거짓도 말하지 못하고, 모든 진실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저를 정말 단순히 편한 사람으로만 생각 하는 건지. 저는 그 모든 것들이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레너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없이 침묵을 지킨 채 여전히 시간만 잡아먹고 있는 단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성메시지는 아직도 녹음이 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마디만 하면.
“……아직도 좋아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희.”
레너드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음성메시지 녹음을 끝내버렸다. 녹음을 종료합니다. 라는 기계음이 이어졌고, 곧 메시지는 저장되었다. 정신없는 상태로 침착해하며 겨우 음성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상황을 설정하고 남자는 또 다시 제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싼 채로 자리에 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그는 한 동안 넋이 나간 채로 자신의 개인사무실에 앉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긴, 긴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
치이지 않을거라고 자신하고 자신했었는데 언제 치였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있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겠지.....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