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좋아하세요?
…뭐, 그냥 그래.
마치 태양을 머금은 마냥, 밝게 빛나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조금 살랑거렸다. 그녀의 다정함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한 채, 이글은 가만히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오래 내릴 것 같지 않아서 잠시 기다리기로 한 채로 두 사람은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한 말이 서로 대화가 오고갈 수 있었던 순간을 끊어버린 것이 아닐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자, 이글은 그 눈동자를 굴려 옆에 서 있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은 가만히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지, 풍경화에 어울릴 법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도시의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런 풍경이었지만, 그녀는 그 풍경을 제 눈에 다 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기억에 담기 위한 것 처럼. 그러다 곧,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구두를 신고 있던 발이 몇 번, 툭,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살짝 눈을 감은 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음을 작게 흥얼거렸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이글씨가 어떤 사람이느냐고…누가 물어봤었어요.
……
…그래서 좋은 분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글씨는, 정말로 좋은 분 이시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가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비가 내리고 있는 곳을 향해 뻗었다. 투명한 빗줄기가 그녀의 팔 위로 떨어지고, 그 팔을 지나 방울 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뚝, 뚝 그렇게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두 사람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 같이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뭘.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그 말에 그녀는 또 한 번 웃었다. 비가 내리는 방향으로 내밀었던 팔을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시 접더니, 곧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팔을 닦으면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기를 다 닦아내고,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접으면서 그녀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있죠, 이글씨.
왜?
비 오는 날, 좋아하시느냐고 제가 아까 물었었죠.
응, 그랬지.
저는…원래 비 오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이글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동자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작음 깨달음에 이글이 짧게 아. 라고 감탄사를 내뱉자 그녀는 또 다시 살짝 미소지었다. 봄 날의 따스한 햇빛마냥. 조용히, 그 어
떤 미소보다도 상냥하고 다정한 그 미소가 이글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정함을 머금은 눈동자를 살짝 감으면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는…좋아하려구요.
당신과 함께 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내리던 비가 조금씩,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시작은 아마, 그의 말 때문이었으리라. 나중에 한 번 만나서 술 한잔을 하자는 그 약속에 답변했을 뿐이었는데 어느 새 온통 주변은 웃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카인은 몇 초, 아니 몇십 초 동안이나 자신이 쓴 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글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장의 끝에 자신이 평소에 쓰지 않을, 절대로 쓸 리가 없는 무언가가 붙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곧 그에게서도 징그럽게 무슨 짓이냐고 답이 돌아온 걸 보고는 카인은 깨달았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어야겠지.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다고 하기엔 그동안 해왔던 기간이 무색했다. 급하게 썼던 말을 지우고 정신을 추슬렀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게다가 한두 사람도 아니고 보고 있었던 눈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미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서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카인은 속으로 고뇌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가끔…가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라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이는 항상 무언가에 불만에 차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 불만이라기보단…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바라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이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도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위로? 걱정? 동정? 아마 아이에겐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을 게 분명했다. 위로도 아니고, 동정도 아니고, 단순한 걱정도 아닌. 아마 진짜가 필요하겠지.
아마도, 아마도.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임무 중에서 만났던 아이의 눈이 아직도 선명했다. 기억 속에서. 그리고 다른 능력자가 자신에게 그랬다.
「저 아이, 마치 네 녀석을 닮았군.」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아이의 모습이 어딘가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어딘가,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어딘가가.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똑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변하는 게 없었다. 아이도 변한 게 없었고, 자신도 변한 게 없었다. 아이는 종종 자신을 찾아왔다. 하지만 별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왜 찾아오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게 두 사람만의 암묵적인 규칙이 되었다.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옆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가버렸고, 그는 그런 아이에게 마중의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잘 가라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시 또 보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가 자신에게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 단지 빅터도 다이무스도 긴말을 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카인은 시바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성격도 너무나도 달랐고, 능력 또한 서로 상극이어서 좀처럼 어울릴 수도, 친해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바는 카인을 볼 때 마다 어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알 수 없는 미소에 카인은 항상 어딘가 모르게 심기가 불편했다. 시바는 그런 카인의 불편한 심기를 즐기기라도 하는 것 인지, 카인을 볼 때 마다 아니 카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런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눈이 더 마주칠수록, 그녀의 그런 미소를 더욱 보게 될수록 카인은 점점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이글씨. 앨리셔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슬쩍 웃으면서 왜? 라고 되묻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빛을 다루는 능력자이기에, 주변에 빛이 있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각은 더욱더 확고해져만 갔다.
두 사람의 이질적인 분위기를 알아 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이 둘의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친근한 척 온갖 척이란 척은 다 하고 있었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그런 것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두 사람은 단지 서로가 서로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을 뿐 이었다. 서로 닮은 부분이 의외로 많아서. 닮았긴 했지만 또 하고자 하는 방향이 달라서. 서로의 송곳니를 감추고, 그저 평화로운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있을 뿐 이었다. 상대방은 언제나 틈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그들은 서로가 그런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가볍게 인사를 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본 모습을 숨기었다. 이 남자는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다. 그게 서로가 가진 첫 인상이었다.
헬리오스의 이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그래.자네치곤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카인.슬로언, 아니 웨슬리. 자네와 그가 만날 때의 공기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일세.홀든 가의 장남이 그러던가?
적어도 그를 좋게 생각은 하지 않지.그럼 나쁘게 생각한단 뜻인가?아니, 그건 또 아닐세.
그는 나와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