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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레너드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창밖을 확인하는 것 이었다. 우주인지, 아닌지 창밖을 통해 확인한 다음에는 꿈 내용을 잊기 위해 일과 관련된 생각을 했다. 차가운 물을 떠오고, 물 한 모금에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일의 끝은 제임스 T 커크라는 것을 깨닫고는 레너드는 제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털어 놓듯, 모든 것을 말한 것 같긴 했지만. 실상 말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14일 동안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있었는지. 혈청을 개발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 날부터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도.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다. 꾸고 있는 꿈은 항상 똑같았다. 제임스의 죽음. 이미 죽어버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 죽은 제임스를 앞에 두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오로지 죽은 제임스와 절망에 빠진 레너드 단 둘 뿐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가 뭘 해도 안 될걸. 마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깼다. 꿈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너무 생생해서 꿈이 아닌 줄 알았다. 모든 사고가 정지해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않게 되었다. 다만 꿈에서의 참담함은 깨어나서도 계속 됐다. 제임스는 살아 있는데, 꿈속의 참담함이 그리고 그 차가운 감촉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만 느껴져서 맥코이는 잠시 꿈속에서 느꼈던 그 절망감에 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이 빠져나가면 맥코이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재활 실에서 재활훈련을 하는 모습은 유리창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제임스는 2주를 꼬박 침대에만 누워 있었던 데다가, 실제로 한 번 죽었었다. 길지 않은 공백처럼 보여도, 제임스의 몸에는 충분히 긴 공백 기간 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꽤 긴 시간의 재활훈련 시간이 주어졌겠지만 제임스의 회복력은 이미 보통 사람들을 넘어서 있었다. 레너드는 옆에서 자신 대신에 봐주던 메딕의 말을 들으며 ‘혈청 때문이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재활에 집중하고 있던 제임스의 눈이 유리창으로 향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서로를 볼 수 있는 구조인 재활 방에서 제임스는 한 동안 메딕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레너드를 바라봤다. 잔뜩 이마에 주름이 졌다. 조금 인상을 구긴 채로 대화를 하던 레너드의 눈이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제임스와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제임스는 웃음을 터트렸고, 레너드는 그런 얼굴을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더니 곧 고개를 돌려 길게 한 숨을 내뱉었다.
“닥터. 얼굴이 정말 반쪽이 됐네요.” 패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레너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복 차림의 우후라가 놀란 눈으로 레너드를 내려 보고 있었고, 곧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옆 자리를 바라봤다. 레너드는 슬쩍 조금 더 옆으로 비켜 앉아서 그녀가 좀 더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심해보이나.”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일단 제가 보기에는 심각해 보이는데요, 닥터. 우선 제대로 주무시기는 하시는 거예요?”
레너드는 대답대신 그저 한쪽 눈썹을 올림으로써 애매한 표현을 했다. 그런 표정에 우후라의 얼굴에 걱정이 서리자, 레너드는 “난 괜찮아. 정말.” 이라고 대답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는 제법 또 멀쩡한 것 같아서 우후라는 이 사람이 어디까지, 얼마나 숨기려고 하는 건지 잠시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레너드의 얼굴을 보다 빤히 쳐다봤고, 그런 긴 시선에 레너드는 그저 너털웃음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진짜 괜찮대도.”
“전 닥터가 괜찮다고 할 때 가장 걱정 되는 것 같아요.”
“……자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가끔 자네가 스팍 같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
레너드는 툭 말을 내뱉으며 어깨를 두드리며 길게 한 숨을 내뱉었다. 그 말에 우후라가 웃는 소리가 났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것 뿐 이야. 갑자기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아졌거든.”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우후라이 눈에는 걱정이 있었다. 우후라는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레너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가끔 닥터가 무너질까봐 걱정 돼요. 그러니까 지칠까 봐요.”
레너드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금방 다물었다. 우후라를 바라보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제 이마를 문질렀다. “닥터는 항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은 없잖아요.” 결국 그 말에 레너드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곧 그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은근히 보는 눈이 정확한 걸.” 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말고도 아는 사람 꽤 많을 거예요.”
“오래 붙어 있는데도 모르는 놈도 있지.”
툭 내뱉어진 레너드의 말에 우후라와 레너드가 거의 동시에 제임스의 이름을 내뱉었다. 다만 레너드는 ‘빌어먹을’ 이 붙었지만. 그 말에 우후라는 저도 모르게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해요, 웃으려고 한 게 아닌데.” 라고 말하며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괜찮아. 마음껏 웃어. 그러라고 말한 거야. 진짜 빌어먹을 자식이야. 몇 년이나 지켜봤지만 그 빌어먹을 자식은 변하는 게 없어. 내가 확 그만 둬야지 좀 깨달을까 싶다가도…….”
뭔가 더 뒷말이 남아있는 느낌에 우후라는 곧 그가 덧붙일 말을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닥터 맥코이는 의사로써, 의료실장으로써 그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험한 말을 하긴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세심하다. 적어도 우후라가 보는 레너드 맥코이는 그랬다.
“……좀 복잡한 기분이야. 화도 나고 말이지.”
“……알아요. 이해해요.”
우후라는 더 말을 하진 않았다.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너드가 그제야 우후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고마워. 조금 도움이 된 것도 같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리고 제 생각엔……함장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나도 알아.”
레너드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단 녀석 회복이 먼저야.” 그 말에 우후라는 그저 한 없이 그답다고 생각했다.
재활훈련을 끝내고 병실에 돌아오면 할 일이 없었다. 패드도 결국 레너드가 가져가 버렸고, 있는 거라고는 어디서 구했을지도 모를 오래 전에 발간된 낡은 종이책 몇 권. 참 능력도 좋지.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대. 제임스는 레너드가 가져다준 책을 몇 권 들춰보면서 그저 웃었다. 그러다 곧 병실의 문이 열리고 정복 차림을 한 스팍이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며 “함장님.” 하고 인사했다.
“스팍. 온 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네. 바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빴습니다. 다만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판단했기에.”
스팍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눈썹을 까딱였다. 그 모습에 제임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어련하실까.” 라고 중얼거렸다.
“회복은 순조로운 모양이군요.”
“응.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보다, 스팍.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제임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양 다리를 까닥거리기만 했다. 한참이나 할 말을 고르는 듯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스팍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라고 딱딱한 말이 나오자 제임스가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그를 붙잡았다.
“……혹시 본즈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있어? 본즈가 따로 뭔가 너한테 말했다던가.”
“직접 닥터 맥코이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얘기를 안 해줄 것 같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표정이 무거웠다. 이런 무거운 표정의 제임스를 본 적은 별로 없다. 스팍의 눈썹이 또 다시 살짝 위로 올라갔다.
“……분명 뭔가 더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말이지.”
“함장님. 그 때는 바로 말하지 못했습니다만. ‘고맙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스팍의 목소리는 여전히 똑같이 단조로웠고, 덤덤했다. 제임스는 스팍에게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되묻거나 하지 않았다. 분명 원래의 그라면, 스팍이 알고 있던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라면 ‘그게 뭔 소린데?’ 하고 바로 물어봤을 텐데. 스팍은 잠시 제임스를 빤히 바라봤다. 제임스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스팍. 그래서 알아? 몰라?”
“알더라도 제가 함장님께 이야기 드릴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그 말에 예상했다는 듯이 제임스가 스팍을 바라봤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알았어. 고마워. 바쁘다며? 더 안 붙잡을게.” 라고 말하며 제임스는 스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스팍은 나갈 때도 살짝 목인사를 하고는 병실을 나섰고, 제임스는 스팍이 나가자마자 그대로 병실 침대에 누웠다.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뭔가 걸리는 것이 많다. 물어보고 싶어도 당장에 물어볼 수는 없을 것 같고.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즈가 말 할 때까지 기다리자니……마치 떠나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하얀 옷이 보였다. 본 적이 있는 옷이었다. 하얀 메디컬 튜닉. 잔뜩 주름이 잡힌 이마와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 제임스는 그를 알고 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모습이 점멸하더니 이제 사라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였다가 그 목소리는 이내 다른 또 익숙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짐. 바뀐 목소리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을 잡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제임스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깬 제임스는 한 참이나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채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