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5 포스타입 업로드
* 제목은 에픽하이 소품집 앨범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 슴스님이 푸셨던 썰 https://twitter.com/damoong25D/status/787928234058854400 을 기반으로 다크니스 이후 혈청 관련 된 부분의 기억삭제를 실행하게 됐는데 약물이 잘못 진행되어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레너드와 그걸 보고 미안하다고 하는 짐입니다.. 짐본즈 맞음...
병실에는 오로지 적막과 함께 기계소리만이 났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을 한 것 인지. 내가 너를 살린 것이,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 것인지. ………너는 왜, 내가 없는 곳에서 죽어갔고, 죽은 체 내 눈앞에 나타난 것 인지. 너는 내게 있어 희망이었고, 빛이었으나 절망으로 찾아왔다.
레너드는 자신의 그동안 걸어왔던 그 모든 것들을 걸고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를 되살리기 위한 혈청을 만들었다. 그것도 죄인의 피를 이용해서. 그 어떤 허가나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도 않았다. 물론 그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지만, 아마 스타플릿에서는 그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의사 자격이 박탈당할 수도 있고, 정지를 당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스타플릿에서 나가게 될 수도 있었고, 계급 강등을 당할 수도 있었다. 더 최악을 가정해보자면 구금 혹은 추방 정도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 레너드의 머릿속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혹시나 자신이 만든 혈청으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함장이 어떠한 변화가 오는 것.
그가 만약 존 해리슨처럼, 아니 칸처럼 변화해버린다면. 스타플릿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겠지. 평소라면 메디컬 튜닉을 입은 채 제임스의 병실에서 제임스의 바이오 스캔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잿빛의 스타플릿 제복을 입고, 다른 두 명의 스타플릿 감시관에 의해 홀로 어떤 방에 앉아 있었다. 이것은 재판이었다. 레너드는 제 양손을 꽉 붙잡았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했다. 감시관 중 한 사람이 걱정스레 괜찮냐고 물었다. 레너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감시관이 말했고, 레너드는 이젠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는 고개를 숙였다.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따가 들어가서도 아무런 변론도 하지 못한다면 어쩌지.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거참 안에 내 친구가 있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콧이었다. “면회 승인서가 있으셔야만 만나실 수 있습니다.” 딱딱한 목소리로 누군가 대답했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 스콧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스팍이 있었다. 두 사람 다 스타플릿 제복을 입은 채로 레너드에게로 걸어왔다. 두 명의 감시관이 살짝 자리를 비켜줬다. 본래라면, 비켜주면 안되겠지만 그들은 잠깐 정도의 시간은 허용해줬고, 두 사람은 레너드의 앞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됐네요, 의사양반.”
스콧의 말에 스팍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분명 뭔가 말하고 싶은 거겠지 싶어서 레너드가 스팍을 힐끔 바라봤지만 다행인지 스팍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좀. 생각하고 있던 거긴 해서 그런지 머리는 괜찮은데. 몸이 내 머리 만큼 안 침착해지네.” 레너드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렇게 대답하며 제 손을 몇 번이고 주물렀다. 시선은 두 사람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 고개를 숙였다. 레너드의 시선은 계속 자신의 발끝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캐롤 건은 어떻게 됐어? 벌써 끝났어?”
겨우 입에서 나온 말에 스콧과 스팍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에 본인을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또 다시 남을 걱정하고 있다니.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레너드가 풍선에 바람이 빠진 것 같은 실없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지만. 만나지도 못하게 하더라. 그래서 이야기도 못했어.”
“……그녀 또한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엔터프라이즈 호에 승선할 예정이었지만, 그것이 철회됐습니다."
레너드의 시선이 다시 발끝으로 향했다. 레너드는 스팍의 말을 곱씹었다. 아마 스팍도, 스콧도 그녀를 위해 많은 발언을 했을 것이다. 스타플릿도 어느 정도 두 사람의 발언을 인정했을 것 이다. 분명히. 아마 그랬겠지. 그래서 아마 그 정도로 끝난 거겠지. “――닥터.” 스팍의 목소리에 레너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끝까지 닥터를 옹호했습니다.”
“……알아. 그랬겠지.”
대답을 하는 입안이 너무나도 쓰고, 텁텁하게만 느껴졌다. 지금 이렇게 대답하는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레너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미쳤수?”
스콧이 잔뜩 열이 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에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이 웃을 때요?” 어이없는 목소리로 스콧이 되물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마냥 한 쪽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그런 스콧을 스팍이 바라보자, 그는 제 다리를 양 손으로 꽉 누르며 레너드를 바라봤다.
“……나도 할 말 정도는 해.”
“지금 말하는 거랑 표정이랑 완전 다른 건 알지?”
스콧의 말에 레너드는 답하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감시관들이 다가왔다. “시간 다 됐습니다.” 그 말에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레너드는 두 사람보다 먼저 앞서 걸었다.
“닥터. 당신은 잘못된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레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걸음이 멈췄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당시에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었고…….” 레너드는 말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는 내내 손을 꽉 쥔 채였다.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거나 끼어드는 사람은 다행이도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런 목소리로 용케도 말하고 있구나, 레너드 맥코이. 말은 이어졌고, 주변은 고요했다. 당시에는 오로지 그 방법 뿐 이었다. 친애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 그는 깊은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꼈고,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살리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트리블이 움직였다. 숨을 내뱉었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다. 후회와 고민은 그 후에 찾아왔다.
“닥터 레너드 맥코이, 아니 레너드 맥코이 중령. 당신의 결정은 의사로써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겠죠.”
레너드의 말이 끝났을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독 중 누군가 먼저 말했다. 레너드는 그 제독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가 누군지 구분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껴졌다. 마치 홀로 우주에 남아버린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레너드는 더욱 주먹을 꽉 쥐었다. 겨우 쥐어짜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좋은 의도로 혈청을 개발한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큼 문제 삼을 부분 또한 만다는 것을 중령 또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인 것 같았다. 여전히 모두의 얼굴이 똑같게 느껴졌다. 레너드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의자 자격의 박탈인가 정지인가? 아니면 추방?
“지금 이 시간부로 레너드 맥코이 중령이 만든 혈청과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 대령에 대한 의료기록, 혈청 주입 등 혈청에 관련된 자료들을 영구 삭제를 진행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반론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없습니다.”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레너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뭔가 가장 큰 문제를 잊고 있는 거 아닙니까. 기록을 영구 삭제한다고 하더라도 그 공식이 맥코이 소령 머리에 있잖소.” 가만히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레너드는 그 말에 반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맥코이 소령이 혈청을 개발했다는 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일급 기밀이죠. 지금 제독은 맥코이 소령의 기억 제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가요?” 누군가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조용했던 공간이 조금 술렁거렸다. “해당 기억을 제거하는 게 안전합니다. 만약 누군가 누설을 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맥코이 소령 머리에 없을 테니까요.” 그 술렁거림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스팍 중령. 말하세요.”
“……말씀하신 이야기는 닥터 맥코이의 인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그 말에 또 한 번 회장이 술렁거렸다. “중령의 말도 맞는 말이죠.”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지만 레너드의 눈에는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서 들리는 스팍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발밑부터 천천히 잠기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 마냥. 기억을 지운다. 지우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만약, 정말 아주 만약에 혈청을 개발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레너드 맥코이는 항상 최악에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발밑이 어두웠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술렁거리던 회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말을 이어가고 있던 스팍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게 맞아. 이렇게 해야 돼. 레너드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전부 잊는 게 좋을지도 몰라. 전부 잊는 게………. 그는 눈을 감았다.
스팍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콧은 좀처럼 말을 뱉지 못하고 그저 황망한 눈으로 레너드를 바라봤다. “……둘 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혈청에 대한 부분만 지우는 거잖아. 그런 눈으로 보지마.” 레너드는 애써 제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처분은 결정 됐다. 직급은 유지, 엔터프라이즈 호 승선도 유지. 다만 모든 기록은 영구 제거하고, 레너드 맥코이의 뇌에서, 기억에서 혈청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제거한다. 다만, 기억을 제거하는 일은 제임스가 일어나고 난 뒤, 적어도 그에게 그가 어떤 방법으로 살아날 수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준 다음으로 결정되었다. 그건 레너드의 요구이기도 했지만, 스타플릿 또한 약물을 준비하는 시간을 필요로 했기에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레너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나게 됐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안 그래? 짐. 레너드의 시선은 그저 앞만을 향했다. 옆에서 그를 따라 걸어가던 스콧도, 스팍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부 잊을래. 전부. ……잊는 것만이 해답인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비집고 튀어나왔지만, 레너드는 애써 그 생각을 접으며 모른 척 했다.
제임스가 깨어났다.
14일만이었다. 별 거 아닌 것처럼 그에게 호들갑 굴지 말라고 말했다. 스스로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제임스에게 그 말을 하고, 병실을 나왔을 때 레너드는 속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가 깨어나기 까지 온통 몸도, 마음도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잔소리를 내뱉지도 못했다. 스팍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제임스에게 나와 우후라도 도왔다며 말을 했지만. 제임스의 말에 스팍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병실에 같이 나오면서 스팍이 불렀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레너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전부 잊고 싶었다. 전부.
“기억제거 약을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전 닥터 맥코이가 이걸 하겠다고 하신 것도 잘 이해되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하는 메딕을 보며 레너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너드의 표정을 살피던 그는 그저 길게 한 숨을 내뱉었다. “약을 주사 받으면 조금 메슥거릴 수도 있어요. 약물이 주입되면 잠에 빠지실 거고요. 약효가 발휘되는 건 사람마다 달라서 정확하게 말해드리기 어려워요. 보통은 48시간 후부터 진행 되지만, 더 빠를 수도 있어요.” 그 말에 레너드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술 의자에 앉아서는 거둔 소매 사이로 하이포가 닿았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하이포가 놓아지는 것도, 약물이 주입되는 것도. 약물이 주입되자마자 속이 메스꺼워져 레너드는 손으로 제 얼굴을 꾹 눌렀다. 머리도 어지럽고, 속도 메스꺼웠다. 구토감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닥터 맥코이.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맥코이. 누군가 불렀다. 레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시선이 흔들렸다. ――본즈.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 호칭이 귓가에 맴돌았다. 여기 없는 사람의 목소리로 맴돌았다. 파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은 아마 안 된다고 말하고 있겠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아. 너는 또, 언젠가 반복할지도 모르잖아. 레너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고 말 안할래. ……하고 싶지 않아.
레너드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의 천장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며 레너드는 숨을 푹 내뱉었다, 아직 모든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약효가 발휘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이불을 걷어냈다. 잠들기 전에 제임스의 환영을 본 것 까지 전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괜히 팔을 문질렀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는 침대에서 발을 내리자, 곧 병실 문이 열렸다.
“좀 어떠세요?”
“……아직 아무렇지도 않네요. 그보다, 나 얼마나 잤죠?”
“3시간 정도요. 차 부를까요?”
“……아뇨. 그냥 좀 걸어야 할 것 같네요.”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며 외투를 챙겼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그는 걸었다. 천천히 걷다,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전부 잊어버리면, 그게 편한 걸까? 접어뒀던 질문이 튀어 올랐다. 레너드는 그저 땅만을 보면서 걸었다.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짐의, 제임스의 검사를 마치고……. 그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비가 내렸다. 빗소리에 모든 것들이 적막으로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레너드는 아주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다 빠르게 걸었다. 아니, 뛰었다. 빗물에 모든 게 흘러 내려가면 좋을 텐데. 녹아버리면 좋을 텐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젖은 코트를 대충 벗어 던졌다. 물을 잔뜩 먹은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로 침대로 다이빙했다. 침대에 엎어져서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온갖 생각이 잠시 뒤엉켰다. 쉬고 싶었다. 다시 잠이 쏟아졌다. 본즈. 머리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났다. 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또 환영이구나. 레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이 쏟아졌다. 눈을 감았다.
꿈을 꾼 것만도 같다. 꿈속에서 자신은 오래 된 책을 들고, 한 페이지를 뜯어 물에 담갔다. 종이가 물에 젖어 축축해지고, 잉크가 흘러내렸다. 또 다시 한 페이지를 뜯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레너드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레너드는 자신이 어제 무슨 일을 했었는지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니까……연락이 와서 방문했고, 그 뒤에………. 약물을 주입했다. 혈청 수식에 대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그래서 수식이 뭐였더라? 혈청이……. 레너드는 잠시 제 눈가를 꾹 눌렀다.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리도 어지러웠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찬물을 받았다. 물을 한잔 마시고, 그는 의자에 앉았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병원에 나가봐야겠지. 레너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끝에 무언가가 걸려 고개를 내리니 코트가 있었다. ……코트가 왜 바닥에 있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휴가를 신청했다고?”
“네. 일주일 신청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닥터?”
걱정스러운 시선을 한 채로 너스가 물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턱 주변을 쓸며 잠시 천천히 생각했다. 내가 그런 신청을 했었던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희미했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가………잘못된 것 같았다.
레너드는 결국 스스로 검사를 했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스타플릿에서는 ‘혈청’에 대한 기억만 제거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당장에 자신이 어제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휴가를 신청한 사실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어제 그래서 결국 제임스를 봤었던가? 어제, 가기 전에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좀 더 기억을 더듬으면 꽤 오래전 기억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피는 얼마나 남아있죠? 누군가 그렇게 물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누군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검사를 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에 따르면 약물이 너무 퍼지고 있었다. 기억이 드문드문 사라지고 있었다. 레너드는 패드를 열어 길게 기록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긴 내용을 써내려갔다.
“…………방금 뭐라고 했어?”
스팍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다. 스콧은 조금 인상을 쓴 채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임스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본즈의 기억을 삭제했다고?” 제임스가 되물었고, 스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혈청에 관련된 부분만입니다. 인권 침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닥터 맥코이가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팍의 말에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파란 눈이 무언가를 잃은 것 마냥 흔들렸다. 그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본즈 어디 있는지 알아?” 제임스는 물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라고 스팍이 덧붙였다. 제임스는 불안해졌다. 온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자신 때문에 또 다시 레너드를 힘들게 한 것 같아서. 그가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나 나가야겠어.”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외투를 챙겼다. 두 사람은 그를 차마 말리지 못했다.
“―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고, 그 쪽에는 의료 가방과 함께 트라이코더를 들고 있는 레너드가 서 있었다. 제임스는 멀거니 레너드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부르지도 못했다. “너 어제 왜 검사 받으러 안 왔어?” 레너드가 대뜸 제임스에게 물어왔다. 그 말에 제임스는 “뭐?” 라고 물었다. 레너드가 무슨 검사를 말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검사? 검사라니?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너드를 바라보자 레너드는 경악에 찬 얼굴을 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총격전을 겪었잖아.”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충격을 먹은 얼굴을 한 채로 레너드를 바라봤다. 그런 제임스의 표정을 본 레너드의 표정도 삽시간에 굳어졌다. 제임스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이 좀처럼 레너드를 바라보질 못했다. 레너드가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얼굴 가득 당혹스러워 보였다. 제임스가 팔을 뻗어, 레너드를 붙잡았다.
“――본즈.”
레너드를 부르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파란 눈이 레너드를 똑바로 쳐다봤다.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제임스는 울지 않았다. 다만 레너드를 붙잡고는 그를 한 참이나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임스의 어깨가 흔들렸고, 목소리는 잔뜩 울음에 젖어 있었다. 엉엉 소리도 내지 못하며 제임스는 레너드의 팔을 붙잡은 채로 울었다. “미안, 미안해.” 계속 사과만을 반복했다. 레너드는 우는 제임스의 모습에 당황스러웠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왜 울어. 너 왜 우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레너드는 떠는 손으로 제임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안해, 본즈, 레너드. 내가 잘못했어. 정말,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임스는 그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레너드는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녹아내린 것만 같았다.
그 뒤에 제임스는 며칠 동안 레너드와 함께 지냈다. 레너드는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기억이 사라져 있었고 그 때마다 습관처럼 패드를 열어 확인했다. 잠들기 전에 아직까지는 기억이 많이 남아 있던 자신이 남겨뒀던 기록을 보기 위해서였다. 레너드는 힘들어했다. 자신의 기억이 듬성듬성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했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 어느 부분의 기억이 또 사라져 있을지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 되고, 레너드의 휴가가 끝날 때 쯤 그는 패드를 살피는 것을 그만뒀다. 테이블 위에 패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레너드는 그저 패드를 바라보다가 한쪽으로 치웠다. 그런 레너드를 바라보던 제임스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
“네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약이 있다면 해독제 같은 것도 있겠지.”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레 레너드의 손을 잡았다. 제임스의 손아래에서 레너드의 손이 꼼지락 거렸다. 아까부터 레너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레너드는 다른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꾹 누르다 곧 눈가를 가렸다. 그가 깊은 한 숨을 내뱉었다.
“……짐. 생각해 봤는데……내가 기억을 없애고 싶었다는 건………그만큼 괴로웠다는 거 아냐?”
레너드는 그렇게 물었다. 눈가를 꾹 누른 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레너드의 손만을 꽉 붙잡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레너드의 옆에 있고, 손을 잡아주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 뿐. 제임스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무력감이 그 동안 레너드가 자신을 통해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난 모르겠어, 짐.” 레너드가 조금 우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이 생각났다. 잉크가 전부 녹아내린 페이지를 들고 황망하게 바라보던 자신이 있었다. 꿈을 꿀 때마다, 자신은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레너드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되돌려야 하는 걸까? 되돌릴 필요가 있는 걸까? 레너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울었다. 마치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