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위한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그들 중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그렇게 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이라고. 그 말과 물음에 슬로언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저 입을 다물고는 그 앞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저 웃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웨슬리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마음 또한 무거웠다. 하지만 생각만은 깨끗해진 상태였다.
하늘은 언제나와 같이 어두웠다. 하늘에 잔뜩 회색 연기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새벽 사이에 비가 내린 모양인지, 온통 물기가 가득했다. 확 가라앉은 공기에 웨슬리 슬로언은 제 코트를 더욱 여몄다. 거리는 고요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표정한 얼굴아래에 많은 생각을 감춘 채 그는 그저 걸었다. 결국 그들도 똑같았다. 아니, 똑같아졌을 뿐이다. 세상에 그렇게 변해버린 것 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실은 그랬던 것인지. 어느 쪽이 진짜 생각, 마음 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그저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의 길거리를 걸었다. 고요하고, 차갑게 공기가 내려앉은 조용한 도시의 거리를.
설득하는 것에는 결국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으며 같았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돌아왔다. 슬로언은 숨을 깊게 토해냈다. 지칠 때까지 시도한 설득의 끝에 슬로언이 얻은 해답은 단 하나였다. 자신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군인이 되었고, 군복을 입었던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하고, 되풀이하고, 떠올렸다. 스스로가 다졌던 마음을 다시 또 한 번 되새겼을 뿐 이었다. 그는 생각을 덜어낸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방안으로 잉크냄새가 가득 찼다. 조용하고, 좁은 방안에서는 그저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숨소리조차 작게, 숨죽이며 그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펜촉을 빠르게 휘둘렀다. 간결하게 자신의 뜻을 담은 편지를 다 쓴 슬로언은 편지를 곱게 접었다. 자신의 뜻에 동의를 해줄 수 있는 사람, 이해를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붙이는 편지였다. 그는 듣고 있던 펜을 내리고, 잉크의 뚜껑을 닫았다. 여전히 방안에는 잉크 냄새가 진동했다.
한 쪽에 벗어둔 군복이 있었다. 자신의 군복이었다. 그래, 군복 이었었다. 이제는 웨슬리 슬로언에게 있어서 이 군복은 그 어떠한 의미도 가지질 못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군인이 되고자 했다. 그곳에 남아 있는 상태로는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이 그가 내린 최종적인 판단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군복 이었다. 슬로언은 짙은 감색 코트를 입고, 한쪽에는 옆구리에 원래 입었었던 군복을 끼고 방을 나섰다.
집 앞에서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군복을 던졌다. 웨슬리는 차가운 땅바닥 위에 던져진 군복을 한 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명예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승리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몇 번이고 시도한 설득은 항상 실패로 끝났다. 짙은 감색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려, 성냥갑을 꺼냈다. 몇 번 탁, 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웨슬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이 붙은 성냥을 군복의 위로 던져버렸다.
불은 순식간에 그 군복을 집어 삼켰다. 웨슬리는 한참 동안 불에 타는 군복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타는 냄새가 났다. 이제는 더 이상의 미련도,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을 떨쳐버렸다. 그들이 하지 않는다면, 자신 혼자만이라도. 그는 코트의 양 쪽 주머니에 제 손을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덩이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날이 춥군.”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웨슬리가 내뱉은 말이었다. 아마 오늘의 일로 순식간에 많은 적을 만들어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아마 자신을 좋지 않게 바라볼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웨슬리는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겨우 웃었다.
편지를 보낸 지 얼마 안 되어, 답장이 도착했다. 정갈한 글씨로 써진 편지에는 그를 돕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웨슬리는 방안에서 그 편지를 쭉 훑어 내리며 그저 웃었다. 가장 처음의, 최초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군사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총장이었기에. 편지를 읽고 있으려니, 잠시 옛 생각이 났다. 모든 쓴 맛을 보기 전의 자신이.
당시 입학생 대표였던 그는 선서를 끝마치고, 총장의 옆 자리에 앉았다. 총장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선서를 하는 내내, 총장은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자네는 왜 군인이 되려하는가. 입을 닫고, 침묵만을 유지했던 총장이 꺼낸 말이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봤다. 아직은 어렸던 웨슬리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총장 또한 웨슬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이기기 위해 군인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 번 대답해보게. 총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웨슬리는 시선 하나 피하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웨슬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총장은 다시 또 입을 다물었다. 그저 다시 긴 침묵이 찾아왔을 뿐 이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군인이 되었다. 몇 번의 전투로 동료를 잃기도 하고, 심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수뇌부 측과 몇 번이고 말다툼을 일으킨 적도 많았으며, 스스로 군인이 된 것에 있어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자신의 다짐을 되새기며 돌이켰다. 스스로를 강하게 다짐했다.
작은 수첩에는 과거 함께 했던 이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자들의 이름이 대부분 이었다. 웨슬리는 그들의 죽음을 잊고 싶지 않았기에. 아니, 그들 자체를 잊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겨야만 했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니까. 결국, 그들은 잊힐 뿐 이었다.
큰 부상을 입은 동료가 있었다. 죽어가던 동료가. 가족들도 모두 죽어, 마지막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웨슬리는 다 죽어가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포기하면, 안 되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웨슬리를 바라봤을 분 이었다. 나도 죽기 싫어. 겨우 내뱉은 말은 간절함이 담긴 말 이었다. 그렇지만.
“……슬로언, 난, 내가 죽을 거라는 걸 알아.”
자네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가족한테 갈 수 있어. 그는 그렇게 작게 속삭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웨슬리는 한참동안이나 곁에 앉아, 그 팔을 붙잡았다. 동료는 눈을 감았다.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잠시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더 이상의 비극은 원하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전투로 보아온 모습들을 다시 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많은 이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비극에 놓이겠지. 말리고 싶었다. 아니, 막고 싶다. 그러기 위해 웨슬리는, 슬로언은 자신이 원래 입고 있던 군복을 벗었다.
더 이상 군인 웨슬리 슬로언이 아니었다. 군복을 벗은 웨슬리 슬로언은 미군에 소속된 군인이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써. ‘웨슬리 슬로언’이란 이름 아래에 스스로 나서고자 했다.